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일상

인생의 터닝포인트는 과연 언제 였을까?

꿈꾸는 치코 2020. 11. 5. 07:52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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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는
과연 언제인가?

 

99년 대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대기업에 취직을 했다. 직장 생활 3년여 한 뒤 돌연 퇴사를 하고 편입을 준비했던 나이다. 사실 프로그래머란 직업이 나에겐 조금 버거운 일이라 더 재밌고 잘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다.

 

마침 내가 몸담았던 H 기업은 희망퇴직 신청자를 모집중이었다. 학창 시절 좋아하던 수학이라 수학선생님이 되어볼까 하는 바람으로 업무 중간에 잠시 이탈하여 종로 근처 편입 상담하곳에 무작정 찾아갔다. 

 

조금 넉넉한 퇴직금을 받을 수 있다는 조건은 나의 무모한 퇴사 의지에 박차를 가했다. 전 대학은 국립대라 학비도 착했지만 사립 등록금은 참 비쌈을 새삼 느꼈다. 난 장학금도 받았던 지라 학비 지원받아서 정말 사립입학금엔 놀랐다. 5남매 중 막내지만 독립적으로 자란 편이다. 지방에서 5남매 키우시기에 버거운 살림이라 늘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는일명 범생 스타일이었던 나이다.

 

퇴사도 내 마음대로, 내 앞길도 내 마음대로, 선택은 항상 내 몫이었다. 누구와 상의 없이 오로지 나의 생각, 나의 판단 그것만이 답이었다.

 

​내친김에 퇴사 후 바로 동대문 김영 편입 학원을 등록했다. 그 당시 편입시험은 영어 달랑 한 과목이었다. 사범대 수학교육과를 지원하는 상황이었는데 시험과목은 달랑 영어 하나라는 사실이 놀랍고 믿기 어려웠다. 수학 공부까지 안 해도 되니 나야 감사하지만 말이다. 시험에 대한 약간 의구심도 들긴 한 건 사실이다. 

 

​경쟁률도 높고 뽑는 인원도 3명 정도라 합격할 가능성이 희박했지만 은근 요런 도전에 흥미를 느꼈던 나이다. 5월 퇴사와 함께 2학기 학사편입을 목표로 3개월 정말 죽어라 편입영어에만 올인했다. 그 결과 당당히 D 대학교 사범대학 수학교육과 편입을 할 수 있었던 나이다. 대학 입학 때도 느껴보지 못한 감격스러움에 합격 확인 후 컴퓨터 앞에서 펑펑 울었었다.

 

이때가 아마 나의 인생의 터닝포인트 인줄 알았다.

 

 

 

 

 

그렇게 난 퇴사한 그 해 2003년 8월 D대학교 사범대학 학사편입을 했다. 난 95학번이었는데 학사 편입해서 아마 02학번이라는 타이틀이 새로 주어 졌다. 수업 같이 들은 애들은 1999년~2002 년생들이었는데 참 귀여웠다. 나이 든 언니/누나라고 잘 챙겨줬던 동생들 생각이 가끔 나기도 한다. 

 

2005년 8월 하반기 졸업을 하고 그렇게 또다시 학위증을 수여받았다. 그리고 그 해 바로 임용시험 한 번을 보고 낙방 후 3년 정도 연애한 지금의 남편과 2006년도에 결혼을 했다. 그러나 임용시험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알기에 결혼은 나에게 또 다른 도피처가 된 듯하다. ​쉼 없이 달려온 난 결혼 후 3년 정도 임용 공부하고 중동 임용시험에 도전하려고 했다. 편입해서 나름 열심히 해서 장학금도 받았지만 임용시험은 또 별개였다.

 

'​미적분학/집합론/선형대수학/해석학/확률과 통계/기하학 개론/미분방정식/복소 해석학/현대 대수학/미분기하학/위상수학/이산수학/실해석학​'이 어려운 걸 학문들을 다 증명해야 했으니 정말 눈앞이 캄캄했다. 수학선생님 되는 길도 참 쉽지 않음을 절실히 깨달은 나이다.그렇게 시간을 갖고 천천히 임용시험에 도전하려고 했던 나의 의지는 허니문 베이비로 우리 큰아이가 생긴 덕분에 모두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. 양가 도움을 받아 육아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오롯이 내가 아이를 돌봐야 하는 입장에서 육아와 공부를 병행하기엔 솔직히 자신 없었다.

 

​공부한 게 아깝다기보다는 그래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왔으니 임신과 더불어 좀 쉬자 하는 생각이 훨씬 컸던 것 같다. 지금 생각하면 편입 때부터 열심히 날 뒷바라지해준 신랑은 나보다 더 허무했을 수도 있다. ​임용시험에 붙은 모든 선생님들 너무 존경스럽고 대단하다 생각한다. 웬만하면 포기하는 성격이 아닌데 임용시험 보고 나온 그날 아~ 이 길이 내 길은 아닐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.​커다란 중등임용시험을 넘을 자신이 없었음을 아주 뼈아프게 느꼈기에 더욱 침울했다. 여기까지가 내 한계인가 싶었다.

 

항상 좋아하는 과목은 수학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던 나는 그날 이후로 정답만 맞히면잘하는 거라 착각했던 나의 수박 겉핥기식의 수학사랑을 직시한듯하다. 난 수학을 좋아하지도  잘하지도 않은 거였다 진심으로.​그렇게 임용시험과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중간중간 교생실습 나갔던 학교에서도 연락이 왔지만 나에겐 나에게 찾아온 아이가 더 소중했기에 감사히 기회를 고사하고 육아에 열중했다.

 

큰아인 어릴 적부터 아토피도 있고 예민한 기질을 가진 아이였기에 사실 남에게 맡기는 건 상상도 못 했다.지금도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. 아이와 함께 나 또한 많이 성장했음을 내가 알고 있다. ​다만 아이들이 커갈수록 자꾸 나의 자리를 되돌아보게 되고 나도 내 일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었다.

 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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아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별개다. 

 

그래서 어렵지 않은 초등수학이라도 내 아이에게 잘 가르치고 싶었기에 큰아이 6살, 둘째 임신 중일 때 태교 삼아 근처 여성비전센터 내 '초등수학지도사' 반을 수강하게 되었다. ​그 수업을 들은 계기로 봉사도 하고 대장 절제 수술을 한 뒤로 다시 주춤했다.

 

건강을 회복 후 2017년부터 조금씩 '기초학력 강사' 일을 하고 있다. 아마 이때가 나의 인생 터닝포인트 시점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. ​내가 과감히 퇴사하고 얻은 '중등학교 정교사 2급 수학'은 기초학력강사 이력서 쓸 때 참 요긴하긴 하다. 랑 이력서 한 줄이지만 그 효력은 무시할 수 없다.

 

학위증수학교육학과
제 2의 학위증과 교원자격증

 

이런 자격증 덕분에 1차 서류는 쉽게 통과 하는 것 같다. 그리고 오늘 아침 또 불현듯 새로운 도전 하고픈 일이 생겼다. 이젠 그 일에 대해 다시 자료도 찾고 책도 찾고 조금씩 내 인생을 더 빛나게 할 일들을 찾아 노력해야겠다.

아무일도-일어나지않는다

 

아무것도 하지 않으면
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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